안녕하세요, 랜디 서입니다.

7월이 끝나가네요. 날이 무더운데 구독자 여러분 모두 건강하고 무탈하시길 빕니다. 이번 달에는 알엠의 [Right Place, Wrong Person] 앨범 리뷰의 파트 1을 보내드립니다. 분량 조절에 실패했습니다. ㅎㅎ 원래 8월에는 어거스트디 리뷰를 쓰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또 밀리겠네요!😂 그러나 아무도 독촉하는 사람 없는 뉴스레터이니 제 마음대로 완성이 되는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

알엠(RM)의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Right Place, Wrong Person](이하 [RPWP])을 들어봅니다.

제목에서 복잡한 정서가 느껴집니다. ‘여기는 맞는데 나만 틀렸다’는 자책이 묻어납니다. 집단에 섞이지 못 하고 겉돌아본 사람이라면 이런 제목에 가슴이 철렁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내 잘못인가' 싶은 그 마음이 떠올라서요. 앞서 내놓은 솔로 1집 [Indigo]는 상업성과 예술성을 골고루 인정 받은 수작이었어요. 그런데 왜 바로 다음 작품으로 이런 쓸쓸한 제목의 앨범을 내놓은 걸까요.

보통 창작자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사자의 메이킹 비하인드 공개나 인터뷰입니다. 알엠은 작업 비하인드를 성실히 밝혀온 아티스트에 속합니다. 방탄소년단의 작업물에 꼬박꼬박 브이앱 라이브(현 위버스 라이브)나 잡지 인터뷰 등으로 본인의 참여 영역을 설명해왔습니다. [Indigo]의 경우 아예 앨범을 만든 배경과 동기를 자세히 밝힌 ‘RM 'Indigo' Album Magazine Film’ 영상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마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Tyler, the Creator)의 [FLOWER BOY: a conversation]처럼요. (제목이 매거진 필름인 것으로 봐서 준비한 주체가 알엠 측이 아니라 위버스매거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기회 될 때 확인해보고 업데이트 하겠습니다.) 이번 앨범은 여태까지 공개된 비하인드는 지민과 함께 촬영한 ‘교환앨범 MMM(Mini & Moni Music) - RM’(이하 교환앨범) 영상이 전부입니다. 평소보다는 정보량이 적다고 느꼈어요. (아직 공개 되지 않은 다른 인터뷰가 있을지도요?) 

저 같은 제3자가 의도를 추측해본들 맞기보다는 틀릴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유통기한이 딱 캐논(이 경우 당사자의 인터뷰)이 뜰 때까지인 거죠 ㅋㅋㅋ 그럼에도 이번 리뷰는 왜 이런 앨범을 만들었는지, 창작자의 마음을 상상하는 일에 집중해보려 합니다.

저는 그가 과거 작업 비하인드를 많이 남긴 이유가 다름 아닌 아이돌인 창작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돌에 흔히 씌워지는 편견을 생각해볼게요. ‘남이 만들어준 작품을 수행하는 사람’이란 인식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죠. 무대 위의 수행 자체도 작품과 예술의 일부임을 간과하는 시선임은 차치하더라도, 이런 편견은 아이돌 창작자들에게 긴 시간 비하의 이유이자 굴레로 작용해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만큼의 기여를 했음을 밝히는 활동이 그에게는 상당히 중요했을 것 같아요. 설사 이런 투명성이 '신비주의'의 아우라를 포기하는 길이 되더라도요. 음악 팟캐스트 ‘앰플리파이드 팟캐스트(AMPLIFIED Podcast)’에서 김영대 평론가는 [RPWP]를 리뷰하며 그가 데뷔 전과 후에 겪었을 힙합 아티스트와 아이돌 아티스트로서의 내적 갈등을 언급했는데, 저 역시 이것이 알엠의 작업을 리뷰할 때 기억해야 하는 중요한 맥락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모든 작업에 이때의 경험과 그 여파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남아있다고 봐요.

교환앨범 영상에 따르면 알엠은 2022년 12월 [Indigo] 앨범을 발표하고 2023년 4월 제이홉과 함께 입대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개인적으로 많은 일이 일어났고 생각도 많아져서 이걸 음악으로 남겨봐야겠다는 의지로 2023년 2월부터 [RPWP]의 작업에 들어갔다고 해요. 방탄소년단은 현재 대부분의 멤버들이 군 복무 중이지만, ‘지연된 프로모’로 공백을 최소화 중입니다. 공백기 내에 각 멤버들이 입대 전 완성하고 간 솔로 프로젝트들을 잘 조정해서 내놓으려면 철저한 계산과 협업이 필요했겠죠. 이런 조건 속에서도 알엠은 풀렝스 2집 작업에 들어간 거고요. 만들고 녹음하는 스케줄이 거의 곡예 수준의 난이도였을텐데, 마음 먹으면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런 작업을 해낼 수 있는 그의 집중력과, 국제적인 스타로서 그가 확보 가능한 리소스가 새삼 대단하다 싶었어요. 최근 나온 지민의 2집도 비슷한 의미로 감탄했고요. 계획을 크게 변경하면서까지 만든 앨범이란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 봅니다. 

알엠이 모은 일명 ‘팀 알엠’이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하는 음악 잘 하는 아티스트들, 특히 인디신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기에, 이들에게 글로벌 무대의 기회를 허락한 ‘플랫폼으로서의 알엠’에 대한 코멘트가 많이 보였어요. 해외에서도 케이팝이라는 상업적인 장르에서 이런 사운드의 앨범이 나오다니 놀랍다는 반응이었고요. 저도 대체로 동의합니다. 모두 일리가 있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저는 아이돌 산업계에서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자 하는 창작자들에게 워낙 관심이 많기 때문에 ‘플랫폼으로서의 알엠’에서 분석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이 분석의 적합함과는 별개로, 이 프로젝트를 주관한 알엠의 크리에이티브한 결정들, 그리고 그 배경이 됐을 만한 이유들이 더 궁금합니다. 특히 알엠의 직업인 아이돌은 도구화 되기가 쉬워요. 위에서 말했듯 주체성이 완전히 탈각 돼있다는 편견이 존재하기도 하고, 워낙에 구름과 같은 인기를 몰고 다니니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면도 있잖아요. 저는 이전에 다른 칼럼에서 아이돌이라는 직업 자체가 ‘젠더화’ 혹은 ‘여성화’ 되어있다고 적은 적이 있습니다. 도구화도 여기에서 연장된 시선입니다. 그렇기에 더욱 그들을 주체로 놓고 인격적으로 읽어보는 독해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알엠이 이 같은 음악을 만들고 이와 같은 아티스트들을 모은 이유에는 ‘이 분들이 국제 무대에서 유명해졌으면 좋겠어서’ 이전에 본인이 세상에 내놓고 싶은 자기 안의 이야기가 있어서일 것 아니에요.

대중음악적인 미(美)보다는 고의적인 부정성을, 순응적인 것 보다는 야수적인 것을 추구한 앨범입니다. 알엠이 이 앨범을 준비하던 시기에 읽던 책이라 해서 한병철의 ‘에로스의 종말’을 읽어봤는데요, “오직 긍정적이기만 한 것은 생동성이 없다”는 문장이 있더라고요. 알엠이 [RPWP] 전까지 발표한 최근작들을 생각해보면, 데뷔 초의 그와 비교해 훨씬 밝은 톤으로 그려낸, 절제가 느껴지는 레코드들이었어요. 그것도 분명히 아름다웠고요. 그렇지만 그렇게 액자 밖으로 삐져나가지 않게 정돈한 예술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갑자기 벽에서 떨굴 것처럼 거칠게 흔들어 털어낸 예술적 충동이 그의 안에 있지 않았나 짐작합니다. [Indigo]가 액자 안의 소담한 작품이었다면, [RPWP]는 액자 밖으로 뻗쳐나간 액션페인팅 같지 않나요?

1. Right People, Wrong Place

첫 번째 트랙 ‘Right People, Wrong Place’는 앨범의 제목의 워딩을 교묘히 비틀어놓았습니다. 앨범 제목의 자책과는 반대로 ‘우리는 맞는데 여기가 잘못 됐어’라는 화 혹은 원망을 담았습니다. 원래 영어권에서 흔히 쓰는 ‘wrong place, wrong time’이라는 표현이 있거든요, 그것의 변주 같아요. 나쁜 일을 당한 상대방에게 ‘그냥 딱 맞는 경우가 아니었을 뿐이야, 타이밍이 나빴을 뿐이야’ 하며 위로할 때 주로 쓰는 표현입니다. 또 다른 변형 예시로는 ‘right place, right time, wrong reason (다 완벽한데 목적이 잘못 됐네)’ 같은 말도 있습니다. 원래가 문장을 이루는 요소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치거나 교차시키거나 짜맞춰 새 의미를 만들어내는 틀과 같은 표현입니다. 평소에도 가사 속 언어유희에 진심인 알엠이 탐낼 만한 소재 같죠.

노래는 문장의 요소들을 블록처럼 이리저리 꺼냈다 집어넣고 재배치 하는데, 선명하기보다는 머릿속에서 들리는 목소리처럼 불분명합니다. 불협 소리가 겹치고 겹쳐 혼란하기 그지 없습니다. 중간에 멀리서 ‘fuck outta my sight!’ 하는 외침도 들리고요. (헤드폰으로 처음 들었을 땐 깜짝 놀랐어요) 한 앨범의 인트로 치고는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닙니다. 달리 생각하면 앞으로의 트랙들이 이런 분노를 담았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시그널도 되겠고, 또 아까 말한 것처럼 머릿속의 혼란을 그린 거라면 그로부터 벗어나고픈 절규일 수도 있겠습니다. ‘Feelin’ high on a forest fire’ 이라는 가사의 반복으로 끝나는 곡은 어떤 이야기의 시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비극의 끝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난 앨범 [Indigo]의 마지막 트랙 ‘No.2’는 그의 20대의 마무리에 웃는 얼굴로 손을 흔드는 정갈한 마침표 같은 곡이었는데, 불과 몇 달 차이로 발매한 2집의 시작이 이렇다니… [Indigo]의 듣기 수월했던, 그래서 팝적으로도 느껴졌던 선량한 멜로디들이 여기에는 없을 거라는 불온한 예고편 같기도 합니다.

2. Nuts / 3. out of love

인트로격인 1번 트랙이 지나가고 2번 ‘Nuts’가 들어옵니다. 소리가 울리지 않게 붙잡으며 진행되는 드럼의 스네어나 억눌린 와우 기타 소리에 불만이 가득합니다. ‘Them Changes’ 같은 곡에서 들어볼 수 있는 썬더캣(Thundercat) 스타일의 훵크와 닮은 질감인데, ‘Them Changes’는 그 짓눌림을 이후 좀 더 밝은 멜로디로 해소하는 반면 ‘Nuts’는 무엇도 해결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불만스러운, 짓눌리고 퉁퉁거리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이어지는 out of love까지가 앨범 전체에서 분노가 가장 높은 구간입니다. 알엠도 ‘교환앨범’에서 “1, 2, 3번 트랙이 굉장히 세다”는 얘기를 했어요.

가사는 알쏭달쏭하나 기본적인 자세는 누군가에 대한 비아냥입니다. 대상이 누구인지 확실히 밝히지는 않습니다. 분명한 디스곡은 아니고, 우화 같은 스토리텔링일 수도 있겠습니다. 대상은 화자의 신뢰를 저버린 것 같은 상황입니다. 앨범의 제목에서 또 따왔을 ‘right place’ (‘I could make this right place for you’ (너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주겠다))가 등장합니다. 화자가 고발하는 대상은 벌스1에서는 she, 벌스2에서는 he입니다. 대상이 하나 이상일 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모호함을 더합니다. 혹은 청자의 주의를 흩으려 집어넣은 인공적인 장치일 수도 있고요. 이 앨범 전체가 그렇습니다. 가사가 대체로 모호합니다. 누구에게 왜 화가 났는지를 밝힐 수 없는 그의 특수한 직업적 위치 때문도 있겠지만, 그래서 좀 더 보편적인 눈높이에서 푼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브릿지에 가면 Bb마이너이던 조가 F메이저로 바뀝니다. 아르페지오로 연주 되는 기타가 앞서 나오던 퉁명스러운 마이너와 달리 몽환적으로 풀려나갑니다. 이 부분의 가사 속 상대방도 ‘Now, lay back / You never been so high’ 하며 화자가 만취하길 유도하는 것 같아요. 혹은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네 마디의 브릿지가 끝나자마자 드럼이 아예 달라집니다. 노이즈가 많은, 쇠로 된 기계처럼 딱딱한 소리로요. 다음 트랙을 들으면 알 수 있지만, 여기서부터 3번 트랙 ‘out of love’로 넘어갈 채비를 하고 있죠.

3번 트랙 ‘out of love’는 ‘Nuts’의 끝에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Nuts’에서는 분노로 비롯된 비아냥이 주된 주제였다면 ‘out of love’는 좀 더 구체적인 분노의 발산입니다. 비꼬지도 않고 그대로 실망 혹은 불신을 말합니다. ‘Nuts’의 말미에 미리 들어온 딱딱하게 때려대는 기계음 스네어는 차일디시 감비노(Childish Gambino)의 ‘Algorhythm’ 같은 곡도 연상 시킵니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극심히 불화 중임이 느껴집니다.

알엠이 자주 쓰는 언어유희 방식 중에 흔한 영어 표현을 분절해 원래와 다른 의미로 조명하는 작법이 있는데요. ‘out of love’ 역시 ‘(done) out of love(사랑하기 때문에 했다)’와 ‘(falling) out of love(사랑으로부터 뚝 떨어지다)’의 뉘앙스를 둘 다 담고 있는 제목처럼 느껴집니다. 비원어민의 눈에만 보이는 해당 언어에의 거리감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아 저는 늘 흥미로워요. ‘Am I Wrong’에서 쓰인 ‘다 마음에 물고기가 살어 / 걔 이름 SELFISH SELFISH’나 ‘134340 (Pluto)’에 쓰인 ‘Us는 U의 복수형일뿐 / 어쩌면 거기 처음부터 난 없었던 거야’ 같은 표현들이 비슷한 예로 떠오릅니다. 현재 영어권 국가에서 지내고 있으면서 이 언어에 어쩔 수 없는 심적 부담을 느끼는 저로서는 알엠의 이런 어프로치가 무척 흥미로워요. 여기 식으로 하는 아재 개그 같아서 재밌기도 하고요, 어쩔 때는 원어민들이 저 같은 이방인을 배제하는 데에 쓰는 무의식적 사회적 장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건드리는 것 같기도 해서 통쾌할 때도 있어요.

4. Domodachi (feat. Little Simz) / 5. ? (Interlude)

Domodachi는 들으면 들을수록 풀려나가는 방식이 독특해요. 무심한 표정의 색소폰으로 시작해서, 어디서 시작했는지 모르겠는 엇박의 드럼이 들어오고, 랩이 시작되고서야 비로소 뒤늦게 리듬의 규칙을 갖춰갑니다. 처음의 색소폰 리프와는 가깝기는 한데 또 키체인지 같은 음을 연주하는 일렉기타, 그 다음엔 베이스가 들어오며 갑자기 걸음을 서두릅니다. 펑카델릭(Funkadelic) 같은 복잡한 매력이 있어요. 욕설과 체념의 가사 뒤로 음악이 허겁지겁 쫓기듯 나아갑니다. 어디에 초점을 둬야 할지 모르는 채로 두리번거리며 걷는 기분이 듭니다.

페나키(Pennacky)가 감독한 뮤직비디오도 봅시다. 주인공 소년이 친구를 뒤로한 채로 자전거를 타고 터널 반대편의 세계로 건너가서 부산하게 끌려다니는 모습을 어지럽게 흔들리는 핀조명으로 잡아주는데요. (유튜브의 ‘고요한 식당’님이 꼽은 포인트를 참고했어요) 이렇게 제시하는 시야는 안정적이지 못하고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저는 터널 너머가 ‘wrong place’ 그 자체를 그렸다고 생각했어요. 위에서 앨범 제목의 뜻이 ‘여기는 맞고 내가 틀렸다’는 자책이라고 적었는데요, 앨범을 듣다보면 ‘사실 여기가 틀려서 내가 지금 불화하는 거잖아’ 하는 화자의 깨달음, 그리고 분노가 더 크게 들려요. 이 ‘wrong place’는 화자를 자꾸만 실망시키는 주변의 반응일 수도 있고, 그가 2022년 ‘찐 방탄회식’에서 생각이 숙성될 틈이 없다며 어려움을 토로한 아이돌 산업계일 수도 있고, 한국 역사상 가장 성공한 세계적 보이밴드라는 부담스러운 위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 합니다.

벌스가 끝나가는 시점에 가사는 친구들을 언급합니다. 혼란 중에 그나마 확실한 건 친구들과 어울리며 지금을 견디는 것 뿐인 것처럼요. 어쩌면 그조차도 사캐즘일지도요. 그리고 이어지는 일본어 코러스는 주술 같아요. (작사작곡에 참여한 아티스트들이 함께 녹음하신 것 같은데 바밍타이거 bj wnjn님 목소리가 특히 엄청나게 잘 들립니닼ㅋㅋㅋ) 벌스에 잔뜩 쌓아둔 복잡성에서 오는 긴장이 코러스에서 그나마 해소되는데, 가사나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불’ 때문인지, 꼭 캠프파이어 주변에 둘러앉아 취기에 멋대로 춤추는 것 같은 이미지입니다. 뮤직비디오에서는 인도자 소년이 나타나 주인공 소년의 가는 길을 이끕니다. 그들의 뒤로 불이 난 듯 새빨간 배경과 혼비백산한 어른들의 모습이 지나갑니다. 주인공이 두 명의 소년이 되는 지점에서 작년에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이 연상 되기도 했어요. 그 영화도 화재로 이야기를 시작하기도 하고요.

드럼 연주가 타이트해지며 피처링 아티스트 리틀 심즈(Little Simz)의 랩이 들어옵니다. 영국식 영어의 맺고 끊는 액센트가 잘 들리는, 타격감이 강한 톤과 플로우의 랩퍼인데요. 그래서 갑자기 스네어를 꽉 조이고 들어오는 드럼과 그 이미지가 아주 잘 어울려요. 저는 알엠이 이렇게 선명한 이미지의 여성 아티스트와 공연(共演) 할 때의 합이 참 좋더라고요. (작년에 나온 So!YoON!(황소윤)의 ‘Smoke Sprite (feat. RM of BTS)’도 좋았어요) 작곡가 슬립 디즈(Sleep Deez, 방탄소년단 [MAP OF THE SOUL : 7] 앨범 수록곡 정국 솔로 ‘시차(My Time)’의 공동작곡가)는 본인 유튜브의 [RPWP] 리뷰 영상에서 리틀 심즈를 불러낸 알엠의 안목을 짚으며 미국 아티스트들도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차일디시 감비노 등의 앨범에도 어울렸겠다고 코멘트 했어요. [RPWP]의 많은 크리에이티브한 결정은 오히려 미국이 아닌 지역에서 나왔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의미로 들려 인상 깊었어요.

뮤직비디오 속 주인공 소년은 인도자 소년의 배웅을 받으며 터널 속 세계에서 빠져나옵니다. 철망을 넘어갈 때 서로 눈을 맞추지만 인도자 소년은 그곳에 남아요. 바깥의 풍경은 핀조명의 불안한 가이드가 끝나고 해가 지는 저녁 하늘로 차분해집니다. 주인공 소년은 자전거를 끌고 자신을 기다린 듯한 터널 밖 친구에 합류하지만, 이내 몇 걸음 가다가 다시 돌아서서 터널 속으로 달려들어갑니다. ‘Wrong place’가 좋아서는 아닐 것 같아요. 다만 그곳에 두고 온 친구가 있어서가 아닐까 상상했어요. ‘Wrong place’의 힘듦을 감수하고서라도 친구를 위해 돌아가는 발걸음이라 생각하면 숭고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 (Interlude)는 재즈 듀오 도미 앤 제이디 벡(DOMi & JD Beck)이 참여했습니다. 도미는 프랑스 태생의 일렉트릭 키보디스트, 제이디 벡은 미국 출신 드러머입니다. 저는 이 앨범을 들으면서 처음 알게 된 팀인데요, 듣다보니 너무 좋아져서 요즘 이들의 2022년 앨범 [NOT TiGHT]를 엄청 듣고 있어요. 발매 당시 도미는 22세, 제이디 벡은 19세였다는데, 젊은 나이임에도 70년대 거장 칙 코리아 등을 연상 시키는 레트로하면서도 신선한 음악으로 주목 받고 있다고 해요. 함께 작업한 아티스트에 앤더슨 팩(Anderson .Paak), 썬더캣(Thundercat) 등 [RPWP] 앨범과 비슷한 결에 있는 미국 서부 훵크 팝 아티스트 이름들이 보입니다.

앨범은 이쯤에서 반환점을 돕니다. 컨템포러리 재즈식 드럼이 작은 도토리처럼 규칙 없이 떽떼구르르 하고 굴러가는 것 같아서 둔탁한 힙합 비트의 드럼보다 마음이 훨씬 가벼워져요. 화성과 멜로디의 비중도 좀 더 커지고, 앨범의 사운드가 색채를 갖추기 시작합니다.